영업 카타르시스 : 0%의 가능성에서 환희의 순간까지!

영업 카타르시스 : 0%의 가능성에서 환희의 순간까지!

막 주니어 딱지를 뗐을 무렵, 내게 한국을 대표하는 국민 기업을 담당하라는 큰 미션이 주어졌다. 사업 다각화를 위해 정보통신 회사를 설립하기로 한 고객사는 새로운 비즈니스 영역에서의 성공 적인 착륙 Landing을 위해 우리 회사와 전략적 파트너 십을 맺었고, 첫 프로젝트인 부가가치통신망 VAN, Value Added Network 사업을 위한 기간 시스템은 우리의 제품을 채택하기로 잠정 결정을 한 상태였다. 이 프로젝트는 향후 전개될 후속 프로젝트의 시발점이었기 때문에 업계의 관심을 끌었고, 회사로서도 매우 전략적으로 대응했다. 경력이 채 4년도 되지 않은 나에게 책임을 맡긴 회사의 결정이 쉽지만은 않았으리라. 영업 담당자인 내가 고객을 잘 몰랐고 해당 산업도 낯설었기 때문에 설렘만큼 두려움도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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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의 가능성, 냉대와 절망의 늪에 빠지다.

회사에서 시무식을 마치고, 미리 인사를 드리기 위해 곧바로 고객사로 향했다.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사람은 창가에 걸터앉아 있던 고객사 본부장이었다. 신규 사업을 위해 외부에서 스카우트된 본부장은 걸터앉은 자세 그대로 우리를 맞이 했다. 서로 명함을 교환하고 간단한 인사를 마친 후 그는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

“IBM에서 사람이 왜 왔나요? 제 이야기를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이전에 여섯 차례나 IBM을 탈락시킨 경험이 있습니다. 이번이 일곱 번째가 되겠네요. 특히 VAN 솔루션은 개방형에 무無장애 시스템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IBM은 그런 솔루션 없잖아요?”

당황스럽고 맥이 빠지기도 했지만 ‘참 특이한 사람이네’라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들었다. 약 30분 동안 유쾌하지 않은 대화를 마친 후, 우리는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인사를 하며 자리를 나왔다. 아직 새로운 본부장에 대해 회사에서는 잘 몰랐고, 상황이 그리 낙관적이지 않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사무실로 돌아와 매니저에게 미팅 내용과 상황의 심각성을 보고했다. 그러자 매니저는 “고객은 단순히 제품을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비즈니스 협력 파트너를 선정해야 하기 때문에 본부장 개인의 의견대로 일이 진행되지는 않을 겁니다.”라는 답만 할 뿐이었다.

문제는 회사 내부에서도 발생했다. 안정적인 서비스 구현과 신속한 시장진입을 위해 우리 회사 내부용 VAN 인프라를 임대하자는 점이 양사 협력의 기본 전제 사항이었는데, 우리 측 본사에서 승인을 받지 못하게 된 것이었다. 우리 회사 내부 서비스용으로 사용하는 VAN 인프라를 상업적으로 판매하거나 제3자에게 제공할 수 없다는 결정 때문이었다. 6주 가까이 본사의 승인을 받기 위해 직원 모두가 나섰지만, 결론은 바뀌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고객 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대안을 제시했지만 고객의 입장은 확고했다. 협력의 전제가 무너지면 전략적 파트너 십은 의미가 없고, 모든 일을 백지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도리어 고객사 직원들 사이에서는 우리가 갑자기 입장을 바꾼 게 아니냐는 부정적인 인식이 점차 퍼져나갔다.

결국 우리가 제시한 대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한 달 후 고객은 ‘상업용 제품을 도입하여 자체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이제 상업용 제품에 의한 완전 경쟁 체제로 게임의 룰이 바뀌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하드웨어와 운영 소프트웨어에서 가동되는 상업용 VAN 제품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불과 두 달 만에 상황이 180도 뒤바뀌었다. 영업할 제품이 없으니 우리가 프로젝트를 수주할 확률은 0퍼센트가 되었다. 의욕에 차 있던 팀은 무너졌고, 담당자인 나 역시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 함께 일하던 선배 엔지니어도 가능성이 없는 프로젝트에 시간을 쓸 수 없다며 다른 프로젝트로 옮겨갔다. 결국 팀 본부장은 나를 불러 다독였다.

“어쩔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수고했습니다. 잊읍시다. 그리고 곧 다른 일을 맡길 테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1년 단위로 담당 고객과 목표가 주어지기 때문에 본부장의 말처럼 연중에 고객을 바꾸는 일은 쉽지 않았다. 엄청난 일을 할 기세로 프로젝트를 시작한지 딱 석 달 만에 모든 것이 없어졌다. 이제 겨우 3월, 나에겐 그 고객 하나뿐이었기 때문에 갈 곳도 없었다. 팀원들도 모두 떠나고 회사의 리더들도 더 이상 그 프로젝트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조금만 더 기다려보세요. 6월 초에 새 고객을 정해줄게요.” “알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포기 못하겠습니다. 아직 공식적인 제안 요청서도 안 나왔는데요.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계속 고객을 만나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갈 곳이 없었던 나로서는 계속 고객사에 가서 진행상황을 듣고 우리가 제안할 방법이 없을지, 고민 속에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그러는 사이 고객과의 만남과 대화가 잦아졌고 나를 안타깝게 생각해 어떻게든 도움을 주려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식사를 마치고 지친 모습으로 고객사에 들렀을 때였다. 물론 고객 프로젝트 팀은 제안 요청서를 준비하기 위해 매일 밤늦게까지 일을 하고 있었다. 고객 입장에서도 복수의 회사를 제안에 참여시켜 공개적으로 경쟁시켜야 하는데, 우리가 빠지게 되어 고민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고객 프로젝트 룸을 들어서는 순간, 고객사의 C과장이 웃으며 나를 불렀다.

 

“장석 씨, 찾았어요. IBM 시스템에서 돌릴 수 있는 솔루션을 캐나다 VAN 사업자가 쓰고 있네요. 이것 좀 한 번 보세요.”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났을 때의 심정이랄까? 흥분되고 또 흥분되는 순간이었다. 요즘처럼 인터넷으로 언제 어디서나 무엇이든 쉽게 검색할 수 있는 때도 아니었다. 어지간한 노력과 집요함을 가지고도 불가능한 일이었을 텐데, 고객이 그것을 찾아주었으니……. 나는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셀 수 없이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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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는 스스로 만드는 자에게만 찾아온다

다음 날 팀에 돌아와 기쁜 소식을 전했지만 이미 기울어진 형세에 그 누구도 적극적으로 제안을 주도하려 하지 않았다. 우리가 제안을 한다고 해도 선정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결국 나는 가까스로 옆 부서 선배 엔지니어의 도움을 받아 혼자서라도 제안 작업을 시작하기로 했다. 우여곡절 끝에 한달 여간의 작업을 거쳐 제안서를 마무리했고, 마지막 제안 설명회 자료를 만들 때에는 밤을 꼬박 새워 9시 30분에 발표할 자료를 8시에야 완료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그저 경기에 참전할 기회를 얻은 것에 불과했다. 고객 사 본부장의 부정적인 시선은 더 커져 있었다. ‘우리 회사가 국내 운영 사례도 없는 제품의 테스트베드(Test Bed)가 될 수 없다’ 는 그의 지적에, 고객 프로젝트 팀원들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나는 비록 원래의 계획대로 우리의 내부용 VAN 제품을 공유하지는 못했어도 공동시장개척을 위한 전략적 제휴 및 장기적인 비즈니스의 협업은 중요한 판단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기울어진 분위기를 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고객 사 본부장의 반응은 싸늘함으로 일관됐다.

제안 발표를 마치고, 나는 다른 프로젝트 제안을 위해 일본으로 출장을 떠났다. 제안 발표에 대한 평가가 일주일 후로 공표된 상태여서 걱정을 가득 안은 출장 길이었다. 일본에서 돌아오기 전날, 그러니까 제안 평가 발표 3일 전에 프로젝트 리더인 고객 사 S부장에 게 전화를 했다. 그는 조직상으로는 본부장의 부하 직원이었지만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사람이었고, 세 차례 사무실에서 회의는 같이했지만 개인적으로 만난 적은 없었다.

 

“부장님, 제안 발표 내용에 대해 저희가 보완해야 할 점이 있는지요?”

“아직 팀으로부터 보고받은 것이 없어서요. 기다려보시죠.” “향후 일정은 예정대로 진행되는 거죠?”

“제가 급한 일로 일본 출장을 가게 되어 일주일 정도 늦춰지게 되었습니다.”

“일본에 오신다고요?” “예.”

“언제 오시나요?”

“왜 그러세요? 내일 저녁 비행기로 갑니다.”

“사실은 제가 지금 일본에 출장을 와 있는데, 시간이 되시면 잠깐 뵙고 제 생각을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

 

핸드폰도 없었던 시절, 국제전화로 질문을 해온 내가 기특하게 여겨졌던지 그는 잠시 망설인 후 만남을 동의해주었다. 호텔과 도착 시간을 확인한 후 나는 체류기간을 하루 더 연장했다.

다음 날 밤 9시 45분, 고객이 호텔에 도착했다. 로비에서 인사를 나누었을 때 그의 인상이 서울에서의 사무적인 모습과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식사하셨나요?”

“아뇨, 부장님도 못 드셨을 텐데, 같이하시죠.” “잠깐 기다리세요. 짐만 놓고 내려오겠습니다.”

 

호텔 바로 앞 스시 집에서 그와 마주 앉았다. 늦은 저녁이어서 맛도 있었지만 고객사의 발전 방향과 고민, 조직 운영상의 문제 등 격의 없는 대화로 두 시간을 보내며 그와 나 사이에 있던 벽이 점점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식사를 마치고 일어서면서 말했다.

“저희는 나름대로 노력을 하는데 본부장님께서 여전히 저희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강하게 갖고 계신 듯합니다. 부장님께서 균형을 잡아주셨으면 합니다.”

“우리 회사는 한 개인에 의해 의사결정이 좌우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프로젝트 팀이 존재하는 이유이고요. 어떤 경우에라도 팀의 의견과 평가를 존중합니다. 최선을 다해보세요. 다른 건 몰라도 공정성만큼은 내가 책임집니다.”

첫 비공식적 대면이어서 그런지 서먹함도 있었지만, 두 시간 동안의 짧은 만남은 프로젝트 수주에 결정적 시간이 되었다.

‘진심’은 차가운 고객의 마음도 돌릴 수 있다

그 후 경쟁사와 우리의 제안에 대한 고객 실무 팀의 평가는 거의 대등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제 최종 의사결정은 우리를 배제하려는 본부장과 중립적 입장을 가진 S부장, 두 사람에게 달려 있었다. 만약 일본에서 두 시간 동안 만나 이야기할 기회가 없었더라면 그도 우리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을 테니 가능성은 0퍼센트였겠지만, 그나마 이제 25퍼센트 정도 가능성이 생겼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사업을 전개해야 하는 고객사 입장에서 보면, 이 결정이 단순한 하드웨어 구매가 아니라 향후 비즈니스 파트너를 선정하는 전략적 의사결정이어야 한다는 점이 우리의 강점이었고, S부장을 통해 우리의 가치를 직접 설명한 기회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2막에 불과했다. 곧 결정할 것 같았던 고객의 선택은 엎치락뒤치락 반복되었고, 그로부터 또 두 달 간의 시간이 흘렀다. 고객에게는 신규 사업을 위한 첫 대규모 투자의 의사결정이었고 공정성과 전략적 요인 모두 고려해야 했기 때문에 신중할 수 밖에 없었다. 시간이 흐르며 프로젝트 팀의 의견은 두 갈래로 나뉘었고, 치열하고 지루한 공방이 계속되었다.

다행히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가 강조한 사업 협력자로서의 제안을 S부장이 의미 있는 부가 가치라 받아들였고, 우리에 대한 부정적 기류는 조금씩 사그라졌다. 이제 가능성은 50퍼센트까지 올라왔다고 확신했다.

그런데 여전히 본부장이 문제였다. 우리에 대한 거부감은 여전했고, 하드웨어에 대한 기술평가와 가격만을 고려해야 한다고 팀을 몰아붙였다. 본부장인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사임까지 생각하겠다고 공공연하게 떠들고 다니기까지 했다. 이제 분위기는 본부장과 S부장의 대결로 변했다.

상황이 개선되지 않은 채 시간이 계속 흘렀고, 이제는 프로젝트를 수주해도 개발 일정에 차질이 생길 정도로 결정이 미루어졌다. 본부장은 우리의 이야기를 아예 들으려 하지도 않았다. 고민을 거듭하고 있을 무렵, 고객 사 C과장이 나에게 언질을 주었다.

“본부장이 사무실에서는 매우 원칙적이고 차갑지만, 사석에서는 아주 개방적이고 유연합니다. 본부장과 따로 밖에서 만나 이야기를 해보세요.”

그러나 ‘고양이 목에 누가 방울을 달 것인가? 도무지 우리를 만나주지도 않는데……’ 하는 걱정이 앞섰다. 그러던 중 본부장이 모 카페에 혼자 자주 간다는 이야기를 C과장으로부터 듣게 되었다.

무작정 선배 엔지니어와 함께 그 카페에 가서 기다리기로 했다. 이틀 째 9시가 되었을까? 카페에 본부장이 들어섰고 역시나 혼자였다. 우린 우연히 그 자리에서 만난 것처럼 인사를 했다. 그리고 역시 그는 사무실에서의 그가 아니었다. 어색해했지만 웃으며 우리와 합석하자고 했다. 시간이 흐르고 대화를 나누면서 왜 그가 우리를 그토록 싫어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IBM은 항상 고자세였습니다. 도대체 누가 갑인지를 모르겠는 정도로요. 도리어 고객이 을이 됩니다. 유연성도 전혀 없고요. 고객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잖아요.”

오래 전 그가 다른 여러 프로젝트를 통해 경험한 우리 회사의 이미지는 아주 좋지 않았고, 자신만의 편견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음을 일러주었다. 어떤 이유에서든 그런 일이 있었다면 우리의 잘못이 명백했다. 정중하게 사과를 했고, 회사 의 문제이기보다는 관련 직원의 개인적인 문제로 보아줄 것을 부탁했다. 더불어 우리의 이번 제안 내용에 문제가 있다면 충고를 부탁한다고 말했다.

“당신들을 만나주진 않았지만, 지난 5개월 동안 당신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유심히 관찰했어. 그런데 이제까지 만났던 친구들과는 좀 다르다는 생각은 했지. 그래도 두 사람이 뭘 바꿀 수 있겠어?”

하지만 그날 이후,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며칠 후 본부장 측의 핵심 과장이 자료보완 요청을 해왔고, 몇 차례 보완 작업이 반복된 후 마침내 우리가 최종 수주업체로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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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희의 순간은 결코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회사가 완전히 뒤집어졌다.

지난 8개월 가까운 시간 동안 일어났던 온갖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감격’ 그 자체였다. 기술 협상이 마무리되어 프로젝트가 시작되었고, 시스템 가격 협상도 프로젝트 팀과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최종 계약 처리를 위해 고객 사 구매부로 넘어가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무조건 ‘추가 할인’을 하라는 지시가 떨어 진 것이었다.

그때는 가격 결정이 지금처럼 실무 부서에 일임되어 있지 않았고, 가격 체계도 유연하지 않았다. 프로젝트마다 계약 금액에 대한 본사의 승인을 반드시 받아야 하는 시절이었다. 우리는 우리대로 고객 프로젝트 팀과 협의가 완료된 가격으로 본사의 승인을 받아두었고, 이미 기기는 발주된 상태였다. 고객사 재무담당 전무는 ‘우리가 요구하는 할인 조건이 수용되지 않으면, 계약을 처리해줄 수 없다’는 자세를 완강히 내비쳤다.

회사의 모든 임원이 나서서 고객을 설득하고 협조를 부탁했지만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고객 입장에서도 첫 대규모 프로젝트였기 때문에 구매 프로세스의 원칙을 세워야 했다. 담당자인 나 조차도 처음 그 고객을 맡은 터라 구매 계약에 대한 추가 가격 협상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엄밀히 말하면 영업을 맡은 나의 불찰 이자 실수였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회사의 모든 임원들이 전전긍긍했고, 고객 사 재무담당 전무는 일체의 논의를 거부했다. 그렇게 6주 가 지났고 마침내 시스템은 서울에 도착했다.

설상가상이란 말처럼, 12월 28일에 할머니께서 노환으로 돌아 가셨다. 남은 마지막 3일 안에 계약을 처리하지 못하면 심각해지는 상황이었다. 새롭게 발표된 시스템의 최상위 제품이 계약도 안 된 상태에서 발주되었고, 출고되어 서울로 도착했으니 이것은 심각한 규정 위반이었다. 회사는 초비상상태에 돌입했다. 상중喪中에 빈소를 지키면서도 내 머릿속엔 계약이 맴돌았다. 조문을 온 선배, 본부장, 전무 모두 내게 직접적으로 말을 꺼내진 못하고 한숨만 쉬 다 돌아갔다.

할머니의 발인 예식이 끝나고, 장지葬地로 향할 시간이 되었다.

내가 장지에 다녀올 경우 연내 계약은 시간상 불가능했다. 결국 나는 가족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발인과 동시에 고객사로 향했다. 고객사 앞 사우나에서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 재무 전무실로 향했다.

“아니, 당신 상喪당했다면서. 어떻게 온 거지?”

“전무님, 제가 죽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발인만 마치고 바로 왔습니다. 몇 번 말씀 드렸지만 지금 상태에서 추가 할인은 정말 불가 능합니다. 제가 구매 프로세스를 제대로 알았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요. 부디 조치를 부탁 드립니다.”

“…….”

“전무님……!”

그 침묵의 시간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고객 전무는 담배를 깊게 들이마신 후, 구매부장을 불렀다. 그리고 소리치듯이 지시했다.

“계약 처리해줘!”

“내가 당신한테 졌네, 졌어.”

회사에서는 모두가 시한폭탄의 타들어가는 심지를 보는 것 마냥 그저 상황을 막막하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발인 후 빈소에서 바로 고객사로 갔고, 결과를 장담할 수 없었기에 나는 고객사로 간다는 사실을 사전에 회사에 보고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리고 회사로 돌아가 매니저의 책상 위에 계약서를 내려놓는 순간, 그 이후 회사의 분위기는 상상에 맡기도록 하겠다.

처음 이 프로젝트에는 한 명의 영업자가 배정되었지만, 9개월 후 팀이 구성되어 직원의 수가 14명이 되었고, 이듬해에는 별도의 본부로 확대되어 지역 사무소까지 만들어졌다. 그로부터 이 고객과는 4년 동안 수백억 원의 대규모 프로젝트를 이어나갔고, 10년 이상 고객과 비즈니스를 독점하다시피 했던 경쟁사의 매출은 반 토막이 났다.

 

사소한 일들이 모여 영업의 승패를 결정한다.

모두가 0퍼센트의 가능성이라 생각했고, 엔지니어까지 도망쳤던 이 프로젝트에는 첫 석 달 동안 영업자 한 사람만 있을 뿐이었다. 주변의 동료와 선배들은 계속 결과를 만들어가는데, 혼자 처절한 상황에서 답을 몰라 갈등했을 영업자의 심정은 어떠했겠는가?

결정적인 순간은 아주 작은 부분으로부터 만들어진다. 일본에서의 전화 한 통, 그리고 그 두 시간 동안의 진솔한 대화가 의사결정자와의 신뢰 수립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크고 복잡한 프로젝트일수록 사소한 일에서 변곡점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이는 계약 서에 도장을 찍는 순간까지 반복된다. 그래서 영업을 하는 사람은 전장(戰場)의 군인처럼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

 

승리를 위해서라면 적일지라도 놓치지 마라.

고객이 부정적일 때에는 항상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그럴 땐 감정적으로 대응하기 보다는 왜 그런지 이유를 제대로 파악하고 문제를 풀어나가야 한다. 침묵하는 고객보다는 불만을 표출하는 고객이 훨씬 고마운 것이다. 이 프로젝트에서 본부장을 최소한 중립의 입장으로 바꾸지 못했다면, 분명 우리는 실패했을 것이다.

 

고객의 프로세스를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마지막에 두 달 가까이 불필요한 시간을 보낸 까닭은 고객의 구매 프로세스를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42.195 킬로미터를 1등으로 뛴 마라토너가 골인 지점을 1미터 앞에 두고 쓰러진다면 승자가 될 수 있겠는가? 불가능한 일을 거의 다 이루어놓고 계약을 못한 채로 해를 넘겼다면, 이 영업자와 조직에는 큰 상처가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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